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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데타, 찻잔 속의 태풍
 
  쿠데타, 찻잔 속의 태풍  
     
   
 

쿠데타, 찻잔 속의 태풍

 

태국에서는 정치 사회적 혼란이 장기화되면 어김없이 ‘쿠데타 설’이 등장한다.

쿠데타는 은밀하고 기습적이며 비합법적 정권 탈취 행위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2000년 이후 태국에선 ‘쿠데타 할 것이냐’고 기자들이 공개적으로 묻고 군부 최고 실력자가 공식적으로 ‘노(NO)’라고 대답하는 일이 되풀이된다. 질문을 받는 사람은 군부의 실력자 육군 참모총장이다.

쁘라윳 총리는 육군참모총장이던 2014년 5월 22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태국의 19번째 쿠데타였다. 그는 쿠데타 일으킨 5년 뒤엔 총선을 통해 4년 임기의 총리가 됐다. 사회혼란이 극심해지자 ‘이야기 좀 하자’며 중요 정치인들을 국방부에 불러 모은 뒤 감금하고 다음날 쿠데타를 ‘선언’한 것이었다.

그보다 8년 전인 2006년 쿠데타는 100여명의 군인으로 시작됐다. 페차분지역 기갑연대가 10대의 트럭과 10대의 탱크에 나눠타고 방콕으로 돌진했으며, 검문소에서는 약간의 상의 끝에 수도에 무혈입성했다. 총격전도, 불상사도 없었다. 방콕을 접수한 군인들은 시민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장미꽃을 받았다.

 

태국에서 입헌군주제가 시작된 1932년 이후 총 19번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중 12번은 성공했고, 7번은 실패했다. 1932년부터 1991년까지 59년 동안엔 평균 3년 5개월에 한 번씩 쿠데타가 일어났다. 48개 내각 중 무려 24개 내각이 군부정권으로 구성됐다. 쿠데타는 육군의 전유물만은 아니었지만 육군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1949년과 1951년엔 해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육군에 의해 제압됐다.

육군참모총장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냐고 공개적으로 질의하는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지만 사실 육군참모총장이 태국군 서열의 최정점도 아니다. 더 높은 3군 사령관도 있고, 국방부 장관도 있다. 하지만 ‘꿩 잡는 것은 매’. 가장 병력이 많은 군대를 직접 통솔하는 군 최고 실력자인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의 정점이다.

2000년 대 이후의 태국 쿠데타 군인들에겐 ‘족보’가 있다. 모두 여왕 근위대인 ‘부라파약’ 계열의 군인들이다. 2006년 쿠데타를 일으킨 손티 분야라끄린 육군참모총장, 그 뒤를 이은 내무부 장관 아누퐁 파오친다 육군참모총장, 2014년 쿠데타를 일으킨 쁘라윳 총리가 바로 전 후임 바통을 이어받은 육군참모총장들이다. 이들이 ‘큰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쁘라윗 부총리는 2006년 쿠데타의 주역 손티 육군참모총장의 선배로 전임 육군참모총장이었다.

19번째 쿠데타의 주인공 쁘라윳 총리는 2006년 태국의 18번째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는 육군에서 가장 중요한 1사단 부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쿠데타가 마무리 공론화될 지언정 ‘예고된 쿠데타’는 없었다. 사회 혼란이 격화돼 ‘쿠데타 질문’이 쏟아져도 그때마다 군은 ‘그럴 리가 없다’며 부인했다. 태국의 사회 분열상이 극심해 방콕 도심 한복판에서 수류탄까지 터지던 2011년에도 쿠데타 설은 어김없었다. 그러자 육, 해, 공군의 최고 실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자회견을 했다. `군은 쿠데타를 하지 않는다’고 공식발표했다. 당시 한 자리에 모인 군 수뇌부들은 `군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만약 쿠데타 음모로 군부대를 이동시키는 사람은 반역자로 간주한다'라는 말했다. 이 기자회견에 참여했던 군인 중의 한명인 쁘라윳 장군은 결국 3년 뒤 쿠데타를 일으켜 8년간 권력을 움켜쥐었다. 다만 발표대로 군부대는 이동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속을 지킨 쿠데타일까?

태국 쿠데타의 외면상 기본메뉴얼은 동일하다. 우선 언론을 장악한다. 지상파, 케이블, 한국위성 방송 등 정규방송은 일제히 중단된다. 동일하게 국왕 찬가만 나오고 가끔 군인이 나와 중요사항을 발표한다. 계엄령이 선포돼 헌법은 중지된다. 야간 통행금지와 집회 금지, 휴교령 등이 이어진다. 의회가 해산되며 군부가 구성한 ‘평화질서유지위원회’ 같은 조직들이 사회 전분야를 장악한다.

쿠데타 발생 후엔 설문조사가 실시된 적도 있는데 태국인들은 ‘안정’을 선택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2014년 쿠데타 발생 40일 이후 태국 여론조사 기관 두싯폴의 설문조사에서 태국인들은 무려 90%가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다고 대답했다. 응답자의 88.5%는 쿠데타 이후 평화가 찾아왔고, 64%는 일터나 학교에 가게 되는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심지어 64.3%는 군인들을 보는 것은 안전감을 높여주고 있으며, 79.4%는 가족과 더욱 많은 시간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장기화된 시위와 분열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매우 특기할 만한 것은 국왕의 역할이다. 그 어느 장군도, 쿠데타에 맞서는 그 어떤 시민지도자도, 어떤 정치적 행동도 국왕의 권위 위에 올라설 수는 없었다. 그것이 쿠데타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2006년 쿠데다 당일, 군인들은 국왕 알현허가를 받아냈다고 발표했다. 축출된 탁신 전 총리의 역쿠데타설이 나오는 가운데 다음날 오후에는 TV를 통해 “국왕께서 군부의 행정개혁위원회를 승인했고, 국민은 군의 지시를 따르라고 했다”는 왕령을 전달했다. 2014년 쿠데타도 모든 중요한 과정이 국왕의 승인을 거친 것은 물론이었다.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어도 국왕의 권위에 맞선 정치인들은 예외없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쿠데타에 맞서 민주시민세력을 이끌었던 전 방콕시장 잠롱은 2006년 쿠데타의 도화선이 된 반 탁신 시위때 국왕의 행차길에 시위대를 이끌다 국왕모독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시위대가 길을 터줄 것은 요청했는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길을 비킬 수 있느냐’고 대답한 게 발단이 됐다. 탁신 전 총리는 왕궁에서 반소매 차림의 `복장불량'으로 내각회의를 주재했다가 왕에 대한 모독이라고 화살을 맞기도 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총리든, 시민지도자든, 심지어 쿠데타까지도 태국에서는 절대지존인 국왕통치 하에서 일어나는 ‘범사의 세상일’이라고 표현한다면 과할까?

이렇게 된 것은 2016년 별세전까지 70년간 통치한 푸미폰 전 국왕의 절대적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십년 동안 외유한번 없이 극도로 절제된 생활과 함께 가난한 자와 농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국민의 존경심이 절대군주와 다르지 않은 카리스마를 만든 것이었다.

태국의 적지 않은 정치인들은 태국의 정치체제를 국왕제 하의 태국식 민주주의라고도 부른다. 태국의 쿠데타는 국왕제도를 인정한 가운데 혼란하고 풀리지 않는 정치상황을 한순간에 해결하는 정치행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